두 번째이자 마지막 코멘트는 4번의 과정이 참으로 안타까웠다(생각해 보면 후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 왜냐하면 4번의 과정을 기점으로 나는 비교적 많은 부문에서 상당히 연약해졌기 때문이다. 가장 큰 부문은 "열정"인데, 열정 없이 어떤 일을 해 나가기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상처이자 아픔, 그리고 회한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4번의 과정을 끝내는 당일에는 굉장한 허무함이 밀려들어옴을 금치 못하여, 나도 모르게 그만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말았다는 것은 조금 아니 매우 슬픈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토록 고귀한 힘을 축적하여 달려온 이 길은 과연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길이었는지, 나는 이 길로 나가기 위해 그토록 소중한 시간을 나 이외의 다른 일에 투자하여야 했는지, 4번의 과정 속 느꼈던 아픔들이 진정 4번의 과정을 끝내는 당일 모두 치유되어 회복되고 거듭나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물었을 때 나는 그렇다는 대답대신 고개를 떨구고 이내 설레설레 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연약해져, 더욱이 열정이라는 귀한 자산까지 허공으로 날아가 바람 빠진 풍선마냥 축 늘어져버린 내게 남겨진 것은 아직은 끝나지 않은, 더욱이 끝낼 수 없는 인생이라는 무거운 숙제였다. 멘토, 친구, 스승은 이상하게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순간 두려워졌다.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리라. 비록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칼과 같으리라. 그렇지만 나는 최대한 내 감정을 절제하며 어김없이 다가올 내일의 태양과 그가 내리쬐는 빛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나 이외의 모든 것은 너무나도 차갑다. 나는 결국 견딜 수 없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 그리고 이 시대의 이 사회에서 소위 가진 자들의 행태로 인한 병폐가 넘어가야 할 거대한 산이라면, 나는 그 산을 차라리 피하고 싶다. 내가 가야할 앞으로의 인생의 길이 반드시 그 산을 넘어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고지순하게, 그리고 진득하게 앉아 그 산을 깎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 산을 깎기 위해서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야만 한다. 나는 그것이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확실성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 자신을 상상하기 싫을 뿐이다. 또한 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나 자신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석하게 여기는 그런 또 다른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의 말처럼 내 속에는 나 자신이 수없이도 많아 나는 때때로 어떤 내가 진정한 나인지, 혹은 어떤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닌지 분별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적이 많았다. 어쨌든 나는 불확실성에 얽힌 어떤 것도 진절머리가 난다. 불확실성과 관련된 어떤 것이라도, 물론 경제학은 제외하고(불확실성이라는 전제 없이는 경제학의 수많은 논리와 학설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경제학을 좋아하는지는 상당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용납할 자신이 없다. 불확실성, 간단하게 묘사하자면 앞이 보이지 않는 구름 같은 곳에 휩싸여 그저 한발 한발 발을 내딛으며, 그러나 그 한 발이 과연 튼튼한 기반의 땅(지면)을 밟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막연한 강박관념에 휩싸인 채, 더욱이 앞으로 나간다 한들 무언가 확실한 것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확실한 것은 단지 매우 적은 확률로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불확실성을 뚫을 자신이 생겨나지 않는다. 나는 그냥 그 산을 피하여 오솔길이든, 개울가길이든, 아니면 조금 험준해 보이는 바윗길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그 거대한 산만을 피한다면 어떤 길이든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산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오늘도, 공정하여야 하지만 결코 공정하지 못한 요금을 징수 받았고.
공정한 사회가 왜 성립할 수 없는지, 며칠 전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토론 장면에 대해 나는 아주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비판 아닌 비판을 서슴지 않고 그대로 적었던 적이 있었다. 이후 그 적어놓았던 것을 다시 읽어 본 바, 나는 그것이 매우 비논리적이고, 저급하여 조금은 비판의 가치와 효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늘 다시 읽어보니 매우 논리정연하면서도, 주장이 확고해 보였다. 더할 나위없는 주장이었다. 특히 공정한 사회에서의 "공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역설한 소위 원천봉쇄의 방법은 매우 훌륭해보였다. 비록 이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까지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나는 매우 뿌듯했다.
이제는 어떠한 법도 믿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우는 공정함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제정한 법도, 그리고 그것을 적용하는 제반 과정도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한, 불가피하여 어쩔 수 없는 힘의 논리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선의의 구성원이 피해를 보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다양한 프로세스로 보일 수밖에 없는 법의 적용을 더욱 애처롭게 여겨야 할 것이다. 00한 자에게 00 00조를 적용하여 00에 처한다는 0의 적용은 그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소꿉장난일 뿐이다. 한 때 매우 정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엄마가 부르면 내팽겨치는, 아빠가 부르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듯 내빼고 돌아보지도 않는 소꿉놀이 속 밥상이요, 가재도구인 셈이다.
우연히 긴 글을 읽고 느낀 점을 그래도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적었다. 꼬집어 본 세상이라는 글처럼 나도 세상을 꼬집기 위해서는 아직 징수 받아야 할 요금이 제법 남았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무념무상의 자세를 최대한 존중하고 견지하여, 내게 주어진 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내 인생에서의 非의무과정, 자유과정을 즐겁고 보람차게 보내고 싶은 것이다.
글이 너무 딱딱한 것 같아, 귀여운 사진을 하나 첨부한다. (출처:Parkeressay 수필공모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