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것이며, 더욱이 모두가 동일하게 밟으며, 지나가는 것인데 시간이라는 녀석은 왜 유독 나에게만 그토록 빠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시간이 지나고 있는 반대방향으로 열을 올리며 전력질주하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그래서 그토록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문득 이것과 연관 지어, 고등학교 때 배웠던 상대속도라는 개념. 자그마한 선생님이 열변을 토하던 그 개념이 생각난다. 서로 다른 물체가 다른 방향으로 운동할 때는 서로 바라보는 속도가 가만히 정지해 있을 때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나는 시간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행하고 있으므로, 역행하지 않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시간이라는 놈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문맥이 맞는지도 모를 이런 설을 풀어내고 있는 나와 그리고 그 설 속 주인공인 나, 시간과는 영 어울리지도 못하고 있는 내가 참으로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다.
#2
어쨌든 전역한지도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 기나긴 여행 아닌 여행을 다녀와서 잠시 묵게 된 곳(오늘을 기점으로 체재기간이 약 3주가량 남은 이곳)은 공교롭게도 군대의 모든 것과 너무나도 유사하여, 나는 오히려 군대에 있었을 시절, 말년의 여유가 그립기까지 하다. 그러나 실언이다. 다시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어디를 생각하든 군대만큼 좋지 않았던 곳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군대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군대에 있었던 시절이 굉장히 힘겹고, 따분하여 지극히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3
이곳에서의 생활을 간략히 말해보자면, 그냥 군대에서의 일과와 매우 유사하다. 군대는 결국 작은 사회와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업무는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군대에서는 중대장이라는 직책으로 인해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실무가 아닌 관리나 결재 따위의 일을 줄곧 수행했다면 이곳에서는 마냥 허드렛일같은 잡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엑셀같은 프로그램으로 이상한 괴문서를 창안하여 결재를 상신하여야 하며, 파워포인트로 괴자료를 생산하는 것. 결재를 상신하면, 거의 반송이 태반이며 그것도 순수한 반송이 아닌 따분하기 그지없는 덧붙임말이 항상 첨가되는 불순한 반송인 것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나도 중대장일 시절에 부사관들이나 병사들이 상신해 오는 온갖 문서들을 꼼꼼하게 체크하여 그야말로 입맛대로 반송하고, 첨가물도 듬뿍 넣어줄 걸 그랬다. 치졸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4
그래도 이 생활이 이제 곧 끝난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조금은 위안을 가지게 한다. - 온전한 우리 나라식 표현으로 바꾸면, 나는 그래도 이 생활이 이제 곧 끝난다는 생각에 위안을 느낀다. 내가 진단한 내 글쓰기 표현의 문제는 어감이 조금 투박하고, 딱딱하여 다정치 못하다는 것과 번역투의 표현이 너무 많다는 것. 예전 중학교 때부터 번역투의 말을 줄곧 답습해 온 탓이다. 예를 들어 영어 교과서를 번역한 자습서 같은 것을 읽으며 공부한 것, 세계 명작을 닥치는 대로 읽다가 세뇌되어 버린 것인데, 더 자세히 말하면 번역투의 표현이 왠지 고상해 보이고 더 세련되어 보였던 그 때의 그 감정이 나를 세뇌시켜 버린 것이다. 나는 이에 완전히 세뇌된 채 글을 끄적인 것이고. - 어쨌든 소속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의 내 모습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과연 이력서에 이곳에서의 생활을 첨언하여야 할지, 그냥 첨언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5
생각해 보면,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내 인생 이십 몇 년 동안 내가 소속감을 완전히 품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자부심과 소속감은 아주 판이한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역시 소속감을 완전히 품었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사람은 본래 사회적 동물인데, 소속감을 한 번도 완전히 품어본 적이 없다는 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인데다가 슬프기까지 하다. 그런데 고무적인 일이라니.
#6
내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성격 탓이다. 사람을 매우 좋아하고, 그리워하면서도, 타인과 함께 있는 건 유달리 어려워하는 참으로 이상야릇한 나의 성격.
#7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고 느끼므로, 안타까운 셈이다. 그러나 고치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 분명히. 가령, 정말 보기 싫은 사람에게 인사를 먼저 건넨다든가 어리석어 보이는 사나이이의 자존심 같은 것들을 버렸다든가 하는 것을 읊어 볼 수 있겠다.
#8
중요한 건, 나에게는 아주 밝고 분명한 꿈이 있다는 것이고, 참으로 쓸데없어 보였던 지난 날의 시간 역시도 나의 꿈으로 도달하기 위한 과정임을 내가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